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크 왕국 (문단 편집) === 배경 === [[파일:5D046CFF-1810-4FB7-9DC7-F4594CBE0CE1.jpg]] 시크 군대 [[이슬람]]과 [[힌두교]]를 접목시킨 [[시크교]]는 당시 수백여년간 이어지던 [[펀자브]] 지역을 포함한 북인도 지역의 피지배층이 내놓은 절충안이었다. 이슬람의 평등 사상과 힌두교의 윤회 사상 등이 합쳐진 시크교는 [[악바르]] 대제 시기와 [[자한기르]], [[샤 자한]]으로 이어지는 무굴 제국의 전성기 내내 존중받아 무굴 제국에 헌신했다. 그러나 이슬람 제일주의를 앞세운 [[아우랑제브]]는 시크교, 힌두교를 포함한 종교들에게 가혹한 탄압을 행하였고, 그에 대한 반발은 거세었다. 특히 [[지즈야]](종교 인두세)의 부활과 무리한 남인도원정으로 인한 재정 악화로 지즈야를 인상한 사건은 그 분노를 가중시켰다. 그 결과, 18세기 초, 아우랑제브의 사망 직전부터 무굴제국의 분열은 명약관화해 보였고, 1707년 그가 사망하자 북부의 시크 교도들과 남부의 힌두교도들은 억눌려 왔던 분노를 폭발시켰다. 18세기 내내 힌두교도의 [[마라타 동맹]]과 시크교도의 세력은 양면에서 무굴제국을 위협하며 그 해체를 가속화시켰다.[* 다만 시크교도 세력은 주로 인도 내부로 확장하기보다는 근거지 펀자브를 위협하는 세력과 전쟁을 벌였다. 18세기 중반이면 무굴 제국이 이미 완전히 유명무실해져 마라타의 보호국 처지가 되고, 시크교도는 주로 아프간족의 [[두라니 제국]] 등과 대립하게 된다. 사실 시크교도 세력은 1715년의 무굴과의 패배한 전쟁 이후에는, 마라타와 달리 세력이 부족해 무굴과 직접 군사적으로 대립하지는 않고 게릴라전으로 일관한다.] 아우랑제브는 이러한 이교도들의 행태를 지켜보지만 않았고 계속해서 탄압해온다. 결국 1675년에 [[아우랑제브]]는 [[시크교]]의 [[구루]][* 인도계 종교들의 선지자를 뜻한다.] 테그 바하두르를 처형시키는데[* 테그 바하두르가 처형된 사연은 이렇다. [[시크교|시크교도]]들이 많은 [[펀자브]] 지역 근방에 [[힌두교|힌두교도]]들이 많이 살았고, 교리상 타 종교에 관용적인 태도를 고수하도록 하는 시크교의 특성 덕택에 힌두교인들과 시크교인들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다. 문제는 [[이슬람 근본주의|이슬람 근본주의자]]였던 [[아우랑제브]]가 이곳의 [[힌두교|힌두교인]]들에게 [[이슬람교]]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자, 힌두교인들은 이 문제를 상의하고자, 테그 바하두르에게 조언을 구하고자 했다. 그러자 테그 바하두르는 직접 [[아우랑제브]]를 만나서 [[힌두교]] 신자들에 대한 강제적인 개종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는데, 이 말을 가소롭게 여긴 아우랑제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테그 바하두르를 처형하라고 했다. 이로써 [[시크교]] 신자들은 테그 바하두르를 일개 종교의 지도자로서 타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전무후무한 인물이라고 추앙해 마지않았고, 얼마 뒤에 [[힌두교]] 신자들과 연합해서 [[무굴 제국]]에 반기를 들었다.] 이것이 시크교도들의 반란에 크나큰 발단이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